임진왜란에서 일본이 보급 실패한 '진짜' 이유

임진왜란에서 일본이 보급 실패한 '진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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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줄 요약 있음!
  1. 애초에 감당이 안 되는 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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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일본에서 큰 싸움 하면 보통 세키가하라를 꼽는다.

동군 서군 합쳐 15만이 넘게 붙었으니 규모로는 확실히 일본사 최대급이다.

그런데 이 전투, 오전에 시작해서 그날 오후에 끝났다.


오다와라 정벌은 20만을 동원해 석 달을 끌었으니 좀 더 길긴 한데,

이건 자기 나라 안에서 벌어진 일이라 사가미만까지 배로 쌀을 실어나르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전국시대 내내 전쟁을 하며 만들어놓은 길과 체계가있어 육로로도 충분했다.


임진왜란은 이 둘과 비교가 안 된다.

1차 도해 병력만 15만 8천이고 나고야 대기 병력까지 세면 동원 규모는 30만에 이른다.

이 병력이 바다를 건너 부산에서 평양까지 밀고 올라갔는데 실제 행군거리로 따지면 600km가 넘는다.

그리고 며칠이나 몇 달이 아니라 몇 년을 그 상태로 버티려고 했다.


병사 하나가 하루 쌀 6홉을 먹는다고 잡으면 15만 명은 하루에 900섬쯤 소비한다.

한 달이면 2만 7천 섬이다. 여기에 말먹이가 따로 붙는데, 군마 한 마리는 사람 여럿 몫을 먹어치운다.

이걸 대한해협 건너에서 매일, 몇 년간 대야 하는 상황이었다.

일본 입장에서는 경험해본 적 없는 규모의 원정이었고,

솔직히 필자는 히데요시가 이 계산을 제대로 해봤는지도 의심스럽다.


  1. 보급 체계의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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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이 재밌는점 많아서 따로 글 쓸 예정)


임진왜란 일본군을 하나의 국군으로 생각하면 이 전쟁이 잘 안 읽힌다.

이건 다이묘 연합군이다.


고니시 부대는 고니시 가문 병력이고 가토 부대는 가토 가문 병력이라,

각자 자기 영지에서 병사 뽑고 자기 영지에서 쌀 걷어서 자기 부대 먹인다.


조선 원정군 전체의 병참을 총괄하는 조직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히젠 나고야는 병력과 물자가 모이는 집결지이자 히데요시가 앉아 있던 대본영이었지,

전선에 물자를 배분하고 관리하는 병참 본부는 아니었다.


전국시대에는 이 방식으로도 별문제가 없었다.

전투가 짧고 거리가 가깝고, 모자라면 현지에서 뺏으면 됐으니까.

란도리라고 해서 점령지 약탈은 사실상 병사들 보수 체계의 일부였다.


그러니까 현지 조달은 일본군이 상황에 몰려서 택한 차선책이 아니라 처음부터 설계도의 전부였다.

이 글의 나머지는 결국 그 설계도가 조선에서 어떻게 한 장씩 찢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1. 육로 보급의 실패

일본군이 부산에 쌀을 못 갖다 놓은 게 아니다.

나고야에서 대마도 거쳐 부산까지는 나름대로 굴러갔다. 진짜 문제는 부산에서 그다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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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국토의 7할이 산이라 애초에 육상 대량 수송을 전제로 굴러가는 나라가 아니었다.

도로는 사람 걷고 파발 달리라고 낸 길이지 수만 명분 쌀을 실은 우마차 행렬이 지나가라고 만든 게 아니고,

씹창난 하상계수탓에 큰 강에 제대로 된 다리도 드물었다.


게다가 육상 수송은 수송하는 인원도 밥을 먹는다는 점이다.


거리가 길어질수록 수송대가 자기 먹으려고 지고 가는 몫의 비중이 커진다.

부산에서 평양까지 쌀을 지고 가면 도착할 때쯤 상당량이 이미 수송대 뱃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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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안전하게 지킬 수도 없었다. 일본군의 점령이라는 게 실제로는 선이 아니라 점이었기 때문이다.

대로변 요충지에 성 쌓고 수비대 박아둔 게 전부고 그 사이 산과 골짜기는 여전히 조선 땅이었다.


곽재우를 비롯한 경상우도 의병이 낙동강 수운을 물고 늘어졌고,

개전 초 붕괴에서 어느 정도 재정비를 마친 경상도 관군도 병참선을 계속 두들겼다.


부산에는 쌀이 쌓여 있고 평양에는 굶는 군대가 있는데 그 둘을 잇는 선이 없는 상태가 이어진 셈이다.


  1. 해상 보급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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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로가 안 되면 남는 건 바다다.

조선은 원래 수운의 나라라 세곡을 서울로 올리는 조운 체계 자체가 바닷길과 강줄기에 기대고 있었고,

서해를 돌아 대동강까지 올라가면 산길로 낑낑대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효율이 나온다.


역사적으로 전 세계에서 육로보다 해로가 우선시 되어 왔고, 이는 현대에도 유효하다.

이 지점을 가장 먼저 짚은 사람이 유성룡이었다.


그는 징비록에서 일본의 수륙병진 구상이 바다에서 깨진 것을 전쟁의 분수령으로 보았고,

이후 이 해석이 지배적이게 되었다.


허나 일본 측에서 서해 수송 작전 계획서가 발굴된 건 아니라는 점에서 확단할 수는 없다.




고니시가 평양에서 더 북상하지 않은 데는 명군 개입 가능성, 병력 소모, 강화 교섭 개시 같은 변수도 함께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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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일본 수군은 서쪽으로 나가지 못했다.

개전 직후부터 남해안에 나온 일본 수군은 옥포, 사천, 당포, 당항포에서 연달아 깨졌다.

그러자 히데요시가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를 묶어 조선 수군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와키자카가 합류를 기다리지 않고 7월 7일 자기 함대만 끌고 먼저 나갔다. 


직전에 용인에서 소수 병력으로 조선군 대군을 흩어놓은 경험이 강한 자만심을 이르켜 판단에 영향을 줬으리라는 추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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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결과는 한산도였다.

견내량이라는 좁은 물목에 있던 일본 함대를 넓은 바다로 끌어내 학익진으로 감쌌고,

73척으로 구성된 함대는 사실상 소멸했다.


이틀 뒤 안골포에서 뒤늦게 도착한 구키의 함대마저 만 안쪽에 갇힌 채 두들겨 맞았다.

사흘 사이에 100척이 넘는 배가 사라졌다.


한산도와 안골포에서 사흘 만에 100척이 넘는 배를 잃자 히데요시가 손을 든다.

일본 수군에 해전 금지령을 내리고 해안에 성을 쌓아 지키라고 지시한 것이다.


일본군이 알아서 소극적으로 변한 게 아니라 최고 지휘부가 해상 결전 자체를 포기했다는 뜻이고,

남해안 곳곳에 왜성이 들어서기 시작한 게 이 명령의 결과다.


그런데 이건 그 자체로 만만찮은 부담이었다.

공격에 써야 할 병력과 물자를 해안 방어에 묶어두는 일이라, 보급을 지키려다 보급을 더 잡아먹는 구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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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수군이 바다로 나오지 않게 되자 이순신은 그 다음을 노린다.

나오지 않는 적은 들어가서 쳐야 한다.


그해 9월 부산포까지 밀고 들어가 정박 중이던 선박 100여 척을 태우고 부산성에 포격을 퍼부은 것이 그 결과다.


다만 이걸 두고 통설처럼 보급의 심장을 끊었다고까지 말하기는 어럅지만,

상륙해서 거점을 없앤 게 아니라 배를 태우고 거점을 위협한 뒤 물러난 것이고,

부산은 이후로도 일본군 최대 기지로 계속 기능했다.

조선 측도 정운이 전사하는 등 손실을 봤다.


애초에 이순신도 부산을 점령할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부산 앞바다는 조선 수군에게 좋은 전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남해 연안처럼 섬과 물목이 많아 적을 가둘 수 있는 지형이 아니고,

물살과 바람도 거칠어 판옥선 운용이 까다로운 데다, 육지 쪽 왜성에서 쏟아지는 화력에 그대로 노출된다.


그리고 상륙한다 하더라도 부산성에 공성을 해야 하는데 그건 미친짓이다.


이후 장문포 해전에서 얼마나 힘든지 제대로 알 수 있는것 처럼 말이다.


나중에 원균이 대함대를 끌고 부산 근해까지 나갔다가 별 소득 없이 배와 병력만 잃고 물러난 일이 이걸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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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부산포는 점령전이 아니라 시위에 가깝다.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고, 실제로 그 뒤 일본군은 해안 방어에 더 많은 자원을 묶어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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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에서 검은색들, 누가봐도 부산으로 가는 길목에 와드 박아놨다)


그리고 이순신이 최종적으로 잡은 답이 한산도였다.

1593년 삼도수군통제영을 여기 두는데, 일본 수군이 서쪽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목이다.

부산을 계속 두들기는 대신, 부산에서 서쪽으로 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쪽을 택한 셈이다.


불리한 전장에서 소모전을 벌이지 않고 자기에게 유리한 바다에 선을 그은 것이고, 그 선이 5년을 버텼다.


여기서 표현을 정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이걸 두고 조선이 남해 제해권을 되찾았다고들 하는데, 실상은 좀 다르다.

부산에서 거제에 이르는 동부 해역은 여전히 일본군 활동 구역이었고 조선 수군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바다가 아니었다.

실제로는 양쪽이 서로의 활동 구역을 봉쇄한 대치에 가깝다.


다만 그 봉쇄선이 5년을 버텼다. 한 번 이겨서 밀어낸 게 아니라 전쟁 내내 유지된 선이었다는 점, 이게 한산도의 진짜 역할이었다.



  1. 현지 조달의 실패

초반에는 현지 조달이 오히려 기대 이상으로 굴러갔다.



한양으로 북상하면서 관아 창고를 털었더니 백미가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병사 상당수는 고향에서 적미와 잡곡을 먹던 자들이라 창고째 나오는 흰쌀은 횡재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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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신이 일본에 갔다오며 쓴 책 일본왕환일기에는 적미가 쌀중 가장 쓰레기라 서술한다.)


그 외에도 잡곡과 된장, 꿀, 술 등 온갖 먹을게 많아 종군 승려 케이넨은 조선일기에 가져온 군량이 필요 없을거라 적기까지 했았다.


다만 창고라는 게 털고 나면 비어버린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점령지에 정식으로 세를 매겨 지속적으로 걷겠다는 것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검지까지 시도했다. 세율은 수확의 4할이었다.


여기서 일본군의 감각과 조선 농민의 감각이 정면으로 어긋난다.

당시 일본은 6공 4민, 그러니까 영주가 여섯 농민이 넷 갖는 게 흔했으니 4할만 걷는 건 일본 기준으로는 오히려 온건한 편이다.


문제는 조선 농민이 일본 농민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조선의 전세는 명목상 10분의 1이고 공법 시행 이후 실제 부담은 그보다도 낮았다.

공납이나 군역 같은 다른 부담이 물론 무거웠지만, 어쨌든 농민이 체감하는 세금은 4할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일본군은 관대하게 매겼다고 생각했고 조선 농민은 세금이 몇 배로 뛰었다고 느꼈으니, 이 간극이 좁혀질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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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개전 초의 학살과 약탈이 얹힌다. 협조를 구할 신뢰가 애초에 없었던 셈이다. 

농민들은 곡식을 숨기거나 태우고 산으로 들어갔고, 향촌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키면서 상황은 더 나빠졌다. 


이들은 일본군 지배 아래서 잃을 게 가장 많으면서 동시에 사람과 물자를 조직할 능력이 있는 유일한 계층이었다. 

조선 땅에서 나는 건 걷을 수 없고 일본에서 가져온 건 지킬 수 없는 상태가 여기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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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활로가 전라도였다.

조선 최대 곡창인 데다 개전 이후 유일하게 온전히 남은 도였으니 여기만 확보하면 현지 조달 전략이 되살아난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금산 방면에서 두 갈래로 들어가려 했는데 

웅치에서 큰 피해를 입고 이치에서 권율에게 결정적으로 깨졌다. 


서일본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던 인물이 막힌 것이다. 

이어 남쪽에서 진주를 통해 들어가려 했지만 1592년 10월 김시민이 3천여 병력으로 3만 대군의 공성을 막아냈다.


일본군 입장에서 전라도는 바다로도 육지로도 뚫려야 하는 곳이었다. 

해상 접근은 한산도가 막았고 육상 진입은 웅치와 이치가 막았다. 


두 축이 동시에 버텨준 덕에 임진년 전라도는 온전히 남았고, 이게 조선이 전쟁을 이어갈 수 있었던 물적 토대가 된다.


  1. 1593년, 한계 도달

1593년 1월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치자 고니시 부대는 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물러난다. 

이 후퇴가 처참했다. 한겨울에 보급 없이 수백 리를 걸었으니 당연한 결과다. 

평양에 들어갈 때 1만 8천여 명이던 1군이 한양에 닿았을 때는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 있었다고 하는데, 

이 손실의 대부분은 전투로 죽은 게 아니라 굶고 얼고 병들어 죽은 것이다.


같은 달 일본군은 벽제관에서 명군을 확실하게 이겼다. 

이여송이 직접 위험에 빠질 정도였으니 전술적으로는 훌륭한 승리다. 


그런데 그 승리를 들고 북상하지 못했다. 먹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이겨놓고도 진격을 못 하는 상황이 보급 실패의 실체에 가장 가깝다.


한양에 모인 일본군은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렸다.


2월, 한양 턱밑 행주까지 쳐들어온 권율에게 이치에 이어 또 깨졌고 

조선군은 한양 외곽의 군량 창고를 계속 노렸다. 


결국 1593년 4월 일본군은 한양을 버리고 남해안 왜성으로 물러난다. 

전투에 져서 밀려난 게 아니라 자기 보급이 닿는 한계선까지 스스로 줄어든 것이고, 

지도 위에 자기 병참 능력의 실제 크기가 그려진 셈이다.


이후 강화 교섭기 3년 동안 일본군은 왜성 주변에서 둔전을 시도한다. 

직접 농사지어 자립해보겠다는 건데, 병사에게 농사를 시키면 그만큼 전투력이 빠지고 

성 밖에 나가면 조선군에 노출되니 잘 될 리가 없었다. 


자립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1. 학습과 되풀이, 정유재란

여기서부터는 앞의 다섯 장과 성격이 다르다.

정유년 일본군을 "또 굶어서 물러났다"고 쓰면 사실과 어긋난다.


정유재란은 애초에 목표가 달랐다. 



명 정복이 아니라 조선 남부를 떼어 갖는 것이었다. 

강화 조건으로 히데요시가 요구한 것도 조선 남부 4개도 할양이었고, 

결렬 후 재침에 나설 때도 이 목표는 유지되었다. 


목표가 남부 확보로 줄면 보급 문제도 같이 줄어든다. 

부산에서 평양까지 잇던 선이 해안 왜성 반경으로 짧아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나가 더 붙는다. 부족한 것은 뺏어 오면 된다는 방식이 사람에까지 적용됐다. 

히데요시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에게 해마다 군사를 보내 조선 사람을 모두 죽여 빈 땅을 만든 뒤 

일본 서쪽 지방 사람들을 이주시킬 것이며 10년이면 성공한다는 취지의 서한을 보냈다. 


정유년 일본군의 초토화와 대규모 납치는 즉흥적인 잔학 행위가 아니라 이 구상의 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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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도 임진년의 실패를 정확히 겨냥해 짜였다.

1597년 7월 칠천량에서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 주력이 야습에 궤멸했고, 

8월에는 남원성이 함락되고 전주에 무혈입성했다. 임진년에 그렇게 못 들어가던 전라도에 들어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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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은 그 흐름 속에서 나왔다.


난중일기가 적선 133척이라 한 것은 조선 함대를 에워싼 배들이고 

도도 다카토라 측 기록과 모리 다카마사의 전투보고서를 보면 명량에 돌입한 것은 주력인 세키부네였다. 


그날 격파된 것은 31척이다. 

뒤에 딸린 선단에 수송선과 약탈·납치용 배가 다수 섞여 있었으리라는 지적도 타당하다. 

강항이 간양록에 남긴, 순천 좌수영 일대에 적선 6~700척이 늘어서고 배마다 조선인 포로가 가득했다는 기록이 그 실태를 보여준다. 

다만 실제로 좁은 물목에 들어와 싸운 배들은 군선이었다.


그리고 명량 다음 날 바닷길이 잠긴 것도 아니다. 

일본 수군은 명량해협을 통과해 우수영을 점령하고 다도해를 따라 무안 앞바다까지 올라왔다. 

오히려 이순신 함대가 당사도와 어의도를 거쳐 법성포, 위도, 고군산도까지 물러섰다. 하루 만에 80km를 뺀 후퇴였다.


그래서 명량의 의의는 다르게 잡아야 한다. 

조선 조정이 명에 보낸 자문에는 수군이 작은 승리를 거두어 적의 예봉이 꺾였으니 

적선이 서해로 들어오지는 못할 것이라 적혀 있다. 


허나 지나가는 것과 보급선을 상시 유지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고, 

명량이 막은 것은 후자였다. 

여기에 칠천량 이후 폐지까지 거론되던 조선 수군이 존재를 증명하고 

서해안을 근거로 단기간에 전력을 재건할 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붕괴 직전이던 조정의 사기를 되돌려놨다는 점이 붙는다. 


보급로를 끊었다기보다, 끊어질 뻔한 조선 쪽을 붙들어 맨 전투에 가깝다고 본다.


정리하면 정유년의 일본은 보급 문제를 해결했다. 

다만 그 해결책이 전쟁 목표를 대륙 정복에서 남부 확보로 낮추고, 

부족한 인력을 조선인 납치로 메우는 것이었다. 


문제를 푼 게 아니라 감당 가능한 크기로 잘라낸 셈이고, 이건 사실상 원래 전쟁의 포기다.



8. 줄인 목표조차 유지가 안됨.


일본군은 정유년 후퇴 이후에도 물러가지 않았다. 

울산, 사천, 순천에 성을 쌓고 눌러앉았다. 정유재란기에만 새로 쌓은 왜성이 10개고, 

그중 상당수는 잠시 머무는 진지가 아니라 지역을 다스리기 위한 통치성이었다. 


순천의 왜교성이 대표적이다. 한 철 휩쓸고 갈 생각이었다면 지을 이유가 없는 건물이다.

(사견으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집이 한건 한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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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 축소된 목표조차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왜성은 바다를 낀 요새라 조선 수군이 단독으로 깨기 어려웠지만, 

반대로 일본군도 그 성을 비워두고 움직일 수 없었다. 


병력이 해안선을 따라 못 박히자 공세 능력이 사라졌다.


결국 원대한 야망을 꿈꾸고 이루기 위해 조선을 침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죽으며 철수를 결정했다.



그리고 엔딩은....

14802.jpg 임진왜란에서 일본이 보급 실패한


3줄 요약

  1. 전국시대식 설계를 그대로 들고 바다를 건넜는데, 이건 짧고 가까운 국내전에서나 굴러가는 물건이었다.

  2. 이순신이 서진하는 바닷길을 5년간 눌러놨고, 의병과 관군이 육상 보급로를 물어뜯었고, 농민이 곡식을 숨기면서 현지 조달이 무너졌다.



  3. 야전에서 거의 지지 않고도 평양에서 한양으로, 한양에서 남해안으로 계속 밀려났다. 정유년에는 아예 대륙 정복을 접고 남부 4도로 목표를 낮췄는데 그마저 유지하지 못했다.



참고 자료


[논문]

이종봉, 「임진왜란시기 일본의 병량미 보급과 그 정책」, 한국민족문화 27, 2006

정완희·민승식, 「칠천량해전과 명량해전의 유형 전투력 분석」, 군사 90, 2014

정진술,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의 원인과 역사적 의의」, 학예지 19, 2012

「정유재란 초기 전라도 방어의 실패 원인」

「정유재란 시기 전라도 지역 일본군 동향과 조선의 대응」, 전북사학

「임진왜란에 관한 새로운 증거와 의미: 참전일본군 및 손실자수」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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